한국 아파트, 왜 '집'이 아니라 '계급'이 됐을까?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눈감는 나라
매일 한강변을 산책하며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니, 아파트가 이렇게 많은데 또 짓고 있네?”
서울에서 이제 탁 트인 스카이라인을 보려면 63 빌딩 전망대쯤은 올라가야 합니다. 어딜 올려다 보아도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고층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기 때문이죠. 이제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주거 공간을 넘어선 존재입니다.
한국인의 라이프사이클은 세계에서도 눈에 띄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떼고, 유치원 갈 때도 "몇 단지 사는 애야?"라고 물어봅니다. 대학에 가서도 "어디 살아?"라는 질문에 "반포 래미안이야"라고 대답을 하며, 결혼하면 "신혼집 어디 구했어?"라고 아파트 얘기를 나누죠.
그러다 아파트를 사기 위해 30년 대출을 받고 평생을 일하며, 전 재산의 70%를 부동산에 몰빵 합니다. 그리고 그중 80%가 아파트입니다 노년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게이트볼을 치며 여생을 보내는... 우리는 그야말로 아파트와 '물아일체'가 되어버린 '아파트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최근 대중문화를 봐도 한국인들의 삶에 아파트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제(ROSÉ)의 ‘아파트’는 세계적인 히트를 쳤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가 생존과 계급의 핵심이 되는 이야기로 한국의 상황을 꼬집으며 풍자했습니다.
오늘 디그에이는 조금 색다른 렌즈를 꺼내 들었습니다. 브랜딩의 관점으로 대한민국 아파트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집을 짓는 건설회사가 아닌 ‘계급을 파는 브랜드’와 마주치게 됩니다. 이제부터,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묘하고도 강력한 브랜드, 바로 ‘아파트’의 얼굴을 하나씩 들춰보도록 하겠습니다.
아파트는 어떻게 브랜드가 되었나?
그럼 도대체 언제부터 아파트가 '브랜드'가 되었을까요?
이야기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강남은 지금처럼 화려한 곳이 아니라 그냥 논밭이 펼쳐진 강 남쪽 동네였습니다. 정부는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강남 개발에 나섰고, 그 해결책이 바로 '아파트'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부의 상징’이 아니라,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실용적 주거 방식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청약'에 목숨 거는 일도 없었고, '분양가 상한제' 같은 단어도 낯선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건설업계에도 한파가 몰아쳤습니다. "이제 집만 지어서는 안 되겠다. 뭔가 다른 집을 지어야 한다." 생존을 위한 차별화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는 아파트가 주거 공간을 넘어 투자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 값이 올랐다더라" "어느 동네 아파트가 잘 나간다더라" 이런 대화들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마치 주식 투자하듯 아파트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건설사들은 여기서 기가 막힌 비즈니스 기회를 발견했습니다. "아, 우리가 집을 파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파는 거구나!"라는 걸 깨달은 것이죠.
최초의 브랜드 아파트의 등장
2000년, 삼성물산은 '래미안(Raemian)'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브랜드를 런칭합니다. 레미안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아름답고 편안한 공간"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집의 기준’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단순한 벽돌 구조물이 아닌, 삶의 품격을 상징하는 공간 으로써의 정체성을 강조했습니다.
이후 2003년 포스코건설의 '더샵(The Sharp)', 2005년 GS건설의 '자이(Xi)'까지. 이렇게 2000년대 초반, 한국 아파트 브랜딩의 빅3가 등장하며 한국의 주요 건설사들은 각기 다른 페르소나를 가진 아파트 브랜드들을 잇달아 선보이게 됩니다. 본격적인 아파트 공화국으로서의 효시가 날아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어땠을까요? 브랜드 아파트들이 일반 아파트보다 10-20% 비싼 가격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은 평수, 똑같은 구조인데도 말입니다. 이게 바로 브랜드 프리미엄의 위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후 ‘브랜드 아파트’를 선호하기 시작했고 점차적으로 계급화가 시작됐습니다.
한국형 아파트 브랜드의 (숨겨진) 서열
자,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 아파트 브랜드의 세계를 들여다볼 시간입니다.
여러분, 학창 시절에 '명품 브랜드 서열' 같은 거 매겨본 적 있으신가요? "샤넬이 최고지", "아니야, 에르메스가 더 위야" 이런 대화들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는 아파트로도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아크로가 끝판왕이지", "래미안도 만만치 않아"
주거 공간이 어느새 '브랜드 경쟁'의 장이 된 것입니다.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에 이제 사람들은 주소가 아닌 브랜드로 답합니다. "반포 아크로리버파크요" "래미안 살아요" "자이 아파트요"
그저 주소가 아니라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방식이 된 것입니다.
프리미엄의 정점, 하이엔드 아파트 브랜드
먼저 아파트계의 '럭셔리 브랜드'들을 브랜딩관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아크로(ACRO), 시그니엘(SIGNIEL), 갤러리아 포레(Galleria Foret)
이 이름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시나요? 외래어 또는 조합어라는 점입니다. 마치 해외 명품 브랜드처럼 들립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특별함"을 연출하는 전략입니다. 백화점 VIP 라운지처럼, "모두를 위한 공간은 아니에요"라고 은근히 선을 긋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중 하나로 유명한 반포 아크로리버파크를 예로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뷰, 커뮤니티 시설은 호텔 수준’
이곳 입주민들에게 아파트는 그냥 주거지가 아닙니다. 프라이빗 클럽에 가입한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재미있는 건, 이런 최상위 브랜드들은 '아파트'라는 단어를 잘 안 씁니다. '레지던스', '파크', '타워'... 이 브랜드 들은 뭔가 더 특별한 공간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중산층의 꿈, 메이저 브랜드
다음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메이저 브랜드들입니다. 래미안, 자이, 더샵, 힐스테이트, 푸르지오
이 브랜드들은 대한민국에서 '안정적인 중산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라는 광고처럼, "저희는 래미안 살아요"라고 말하는 게 은연중에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요?
언뜻 보면 외관은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각 브랜드는 나름의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래미안은 "믿을 수 있는 삼성의 품격", 자이는 "도시적이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 푸르지오는 "친환경 웰빙 라이프"
이 브랜드들의 강점은 '대기업의 신뢰도'입니다. "그래도 현대건설이 지었으니까" "삼성이면 믿을만하지" 즉 브랜드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이 실제 건축 품질만큼이나 중요한 구매 요소가 된 것입니다.
중소형 브랜드와 로컬 브랜드
물론 모든 사람이 메이저 브랜드를 선택하는 건 아닙니다. 지역 건설사들도 나름의 브랜드를 만들어 경쟁합니다. 그리고 브랜드가 없는 아파트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서울의 한 지역 실거래가를 비교해 보면 같은 면적, 비슷한 연식인데도 가격이 꽤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브랜드 프리미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재건축할 때도 브랜드 도입 여부가 큰 관심사가 된다는 점입니다. 평수나 위치보다 브랜드를 먼저 말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질'을 브랜딩 합니다.
주소가 아닌 욕망을 파는 네이밍의 심리학
아파트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강 자이", "리버사이드 래미안", "서울숲 더샵", "청계천 힐스테이트"
바로 '프리미엄 지명' + '브랜드명'의 공식으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고, 이름을 개명하면서 까지 ‘지명’을 추가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재미있는 건, 실제로는 한강에서 2km 떨어져 있어도 '한강'을 붙이고, 서울숲이 걸어서 20분이어도 '서울숲'을 붙입니다. 한국에서 아파트 이름에 가장 비싼 단어는 '한강'이고 그다음이 '숲', '공원', '리버' 순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죠.
이뿐만 아니라, 아파트의 이름은 갈수록 길어지고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지명 + 브랜드 + 외래어 프리미엄 수식어의 3단 콤보로 어떻게든 ‘프리미엄’ 임을 강조하고자 한 결과물이죠.
양반집은 대문부터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브랜드 아파트들이 단지 ‘네이밍’만 브랜딩에 힘을 쏟은 것은 아닙니다. 브랜드 아파트는 대문 앞에서부터 다릅니다.
커다란 대규모 단지의 입구에 들어서면 그 으리으리함에 왠지 위압감을 느끼게 됩니다. 호텔 같은 차량 출입구, 내부 홀도 마치 미술관 같이 연출해 놓은 아파트들도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리조트에 들어간다”라는 공간의 경험을 주는 것이죠.
그리고 입주민들을 위한 ‘단톡’을 운영하는 것은 이제 보편적인 일이 됐고, 더 나아가 전용 앱까지 제공하는 브랜드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서비스들로 "우리는 특별한 커뮤니티"라는 소속감이 강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해외의 대규모 주거시설 브랜드는 어떨까?
먼저 미국을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대도시에 있는 콘도미니엄들의 마케팅 포인트는 "Your unique space" (당신만의 독특한 공간) "Be different, be you" (다르게 살아라, 너답게)와 같이 브랜드보다는 개별 건물의 특성이나 개인화를 더 강조합니다.
대규모 단지? 거의 없습니다. 물론 국토의 면적 등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으로 “왜 남들이랑 똑같이 살아야 해?”가 기본 정서니까요.
일본 맨션 문화는 또 다릅니다. 일본의 대규모 주거시설은 브랜드보다는 관리회사를 좀 더 중요시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내진 설계 등급, 방음 성능 등 이름보다 실용적 기능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유사한 점은 역세권을 선호한다는 점이지만, 대다수 일본의 맨션들은 한국처럼 대규모 단지로 조성되어있지 않습니다.
아파트가 만든 짙은 그늘
압축성장과 도시 과밀화, 결국 우리는 대단지 아파트라는 독특한 주거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한국의 아파트는 ‘효율의 극대화’라는 한국인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효율성의 이면에는 획일화가 있었습니다. 2000년대 후반 고등학생들이 모두 노스페이스를 입고 버섯 머리를 할 때처럼, 신도시 젊은 엄마들이 모두 몽클레어를 입을 때처럼, 남들과 다르면 불안한 문화가 아파트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거기에 더해 압도적인 교육열과 부동산으로서 자산 가치 보증수표라는 것도 아파트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해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브랜드 아파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불안정한 시대의 안정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주거 환경의 다양성보다는 안정적인 자산이 필요했던 거지요.
콘크리트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대지진 후 유일하게 남은 아파트, 그곳은 생존의 공간이자 계급의 상징이 됩니다. 영화는 극단적이지만, 우리 현실을 날카롭게 비춥니다.
하지만 최근 20-30대 사이에서는 브랜드보다 라이프스타일을 중시하며 ‘작지만 안락한 내 공간’을 지향하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습니다. ‘코리빙’이나 ‘쉐어하우스’ 같은 새로운 주거 실험들이 도시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은 아직은 작지만, “꼭 아파트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아파트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인 수도권 인구 밀도, 사방이 막힌 국토로 인한 효율적 토지 이용의 필요성으로 인해 아파트는 앞으로도 한국 주거의 중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에 브랜드 아파트들의 경쟁도 온갖 미사여구 갖다 붙이기나 ‘한강 팔이’가 아닌, 진짜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뤄지는 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집은 단순히 공간이 아니라 삶이 머무는 곳이니까요.
오늘도 서울이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숲은 수많은 불빛들로 반짝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불빛 속에 브랜드를 넘어선 각자의 소중한 이야기가 있기를 바라며 오늘 콘첸츠 마치겠습니다. 디그에이는 다음에도 흥미로운 주제를 디깅하여 브랜딩관점으로 세밀하게 분석하여 찾아오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감사합니다.
문의 :
brandminer.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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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diggi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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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자료
https://www.segyebiz.com/newsView/20240711507675
https://www.apt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379
https://news.nate.com/view/20241005n03625